pencilpenbrush: 저는 현재 미국 내 대학도서관 Preservation/Conservation Lab에서 책 수선가Book conservator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소속되어 있는 학교에서 북아트와 페이퍼메이킹을 전공한 것을 계기로 이곳에서의 시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네요. 2014년에 처음 전공을 택했을 당시 저는 서양제본의 방식과, 구조, 재료에대한 실습이 많이 부족한 상태였는데요, 그때 지도교수님께서 가장 전통적인 방식의 제본 기술들을 익히기에 빠르고 좋은 기회가 될 거라고 지금 도서관의 책 수선 일을 소개해주셨던 게 첫 인연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훼손된 책과 지류를 수선하고 보수하는 일을 합니다. 거기에는 엽서 한 장, 일반적인 책부터 희귀 지도나 희귀 서적까지 다양한 종류의 서적과 지류가 포함됩니다.
비교적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과를 보내는 편이에요. 보통 아침 6시쯤 일어나서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9시까지 도서관으로 출근을 합니다.(가끔 오전 수업이 있는 날에는 오후에 출근을 하기도 하고요.) 하루에 네 시간 정도 도서관에서 책 수선 작업을 하고, 그 이후에는 개인적인 업무를 보거나 페이퍼메이킹 랩이나 제 스튜디오에서 개인 작업을 해요. 마감이 밀린 경우엔 작업하느라 밤을 새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론 개인 작업 시간을 하루에 최대 네 시간 정도로 정해놓고 그걸 넘기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에요. (물론 종종 일이나 작업은 전혀 하지 않고 마냥 놀기만 하는 날도 있지만요.) 밤 10시 이후로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는 나름의 규칙을 정해두었는데, 저는 이렇게 좀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생활리듬을 가져야 스트레스를 덜 받더라고요. 아, 최근에 운동을 새로 시작했네요. 제 하루 일과에 아주 큰 변화랍니다.
보람이라고 한다면…… 글쎄요, 많은 사람들이 망가진 책을 다시 튼튼하고 깨끗하게 수선하는 이 일의
과정 자체에서 보람을 느끼고 의미를 찾으시는데, 저는 그런 부분에서는 생각보다 보람을 크게 느끼지 못해요. 그 과정이 제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거나 그 어떤 보람도 없다는 뜻은 아닌데 뭐랄까요, 생각만큼 아주 큰 보람이 생기지는 않아요. 설명하기가 조금 어려운 부분이네요. 일단 수선의 과정을 시작하고 나면 세심하게, 또 접착제가 마르기 전에 빨리
작업을 진행시켜야 하는 순간들이 많다보니 정작 수선하면서는 집중을 해야 해서 그런 감성을 가질 겨를이 잘 없더라고요. 기술적인 부분을 많이 필요로 하는 직업이라 저는 일할 때만큼은 좀 기계적으로 일하는 걸 선호합니다.
그리고 책을 수선하다보면 망가진 책을 잘 고쳤다는 즐거움보다는 오히려 슬퍼질 때가 있어요. 수선하는 모든 책들이 다 그렇진 않고, 책이 정말 심하게 훼손되었을 때 특히나 그런 감정이 드는 것 같아요. 이제 편하게 떠나보낼 때가 되었는데 억지로 수명 연장을 시키는 기분이랄까요. 도서관 책들이라 더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어요. 개인의 사연이 담겨 있는 책을 수선하는 일이라면 매번 큰 보람을 느낄 것 같은데……. 누군가에게 소중한 걸 고쳐준다는 건 대단히 기쁘고 보람된 일이니까요. 하지만 도서관 책들은 그렇게 수선되어 다시 선반에 놓이고 나면 그때부터 불특정 다수에 의해 대출될 때까지 기약 없는 시간과 습도와 중력과 벌레와 자외선을 참아가며 망가지기 시작해요. 그렇게 생각하면 좀 슬프더라고요. 전에 친구에게 이런 제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그 친구는 제가 물건에 너무 감정이입을 한다며 놀렸어요. 맞아요. 그럴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대상이 사람이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물건이든, 오랜 시간 같이 있다보면 정을 주게 마련이니까, 저는 그런 쪽인 것 같아요. 그래서 조금 슬퍼요.
손목과 손가락 관절들이 힘들어요. (절대적으로요!) 책
수선 작업이 섬세하고 가벼운 종이들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쓰이는 도구들의 무게 때문에, 또
책 자체의 무게 때문에 매 과정마다 손목과 손가락에 많은 무리가 가요. 평소에 관리를 잘해줘야 하는데 하루 일과를 끝내고 나면 게으름이 몰려와서 놓칠 때가 잦아요. 덕분에 요즘 손가락 통증으로 고생중이랍니다.
각각 나름의 매력과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딱 하나만 꼽기는 어렵고요, 그보다는 제가 종종 하는 취미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네요. 전 한달에 한 번 월급이 들어오는 날 전후로 동네 헌책방에 가서 혹시 건질 만한 책이 없는지 살펴보는데, 종종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많이 망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한 권씩 사와서 수선 작업을 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이게 은근 재미있더라고요. 도서관용 책이 아니니 수선하는 데 부담도 없어서 이것저것 실험도 해볼 수 있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여유롭게’ 해체를 해볼 수 있다는 점도 좋고, 또 기술적인 부분들을 연마하기 위한 연습이 되기도 하고요. 그렇게 헌책방에서 구해 취미로 수선한 책들이 의외로 기억에 많이 남아요. 도서관 책들이나 단독/의뢰 작업들은 책임감을 가지고 해야 하는 일이고, 또 어떻게 보면 의무적으로 제작에 임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렇게 헌책방에서 구한 책들은 좀더 소꿉친구 같은 느낌이라 편해서 그런가봐요. 집에서 혼자서 이렇게 저렇게 가지고 놀 수 있다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즐겁기만 하니까.
네. 그동안 작업해온 아트북들이 있는데, 지금은 모두 한 권씩만 제작된 상태고 이후 소량의 에디션으로 만들어 판매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빠르면 올해 하반기부터 하나씩 선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죠. 무엇보다도 제책 작업에 필요한 다양한 재료들을 구하기가 쉬워서 아주 좋아요.
제가 답하기엔 조심스러운 부분이네요.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 있어서 그동안 한국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직접 보거나 경험하진 못했고, 그래서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동안 온라인, 특히 SNS를 통해서 이 분야와 관련된 새로운 시도들이라든가 소식들을 접하긴 했지만 그게 또 전부는 아닐 테니까요.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동안 접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이 분야에 대해서 흥미롭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저에게도, 대중들에게도 이 분야에 대한 생소함과 낯설음이 진입장벽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호기심이 점점 더 커지면서 분명 지금의 상황을 더 좋게 만들 거라고 생각해요.
책 수선이라는 분야가 한국에서는 워낙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저 역시 이 일을 오랫동안 해온 다른 누군가로부터 배우고 훈련을 받아서 그걸 또다시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일이니까 저 스스로 새로운 장을 열어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내가 이 분야에 대해서 어떻게 소개를 해야, 또 어떻게 시작을 해야 이 일을 하면서 느끼는 재미까지 사람들에게 더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그런 부분이 설레고 걱정이 되요.
작업장의 이름은 ‘재영 책수선’으로 정해졌습니다. 현재 로고가 완성되었고, 공간과 다른 부분들도 하나씩 준비중입니다. 빠르면 2017년 말이나 2018년 초에 한국에서 오픈할 계획이에요. ‘재영 책수선’에서 다루는 것들로는 책수선과 제작이 기본이겠지만, 그밖에도 재미난 것들을 추가로 구상하고 있어요. 좀더 구체적인 사항이 정해지고 만들어지면 온라인을 통해서 또 알리겠습니다.
생활인문잡지 는 먹고 입고 자는 우리의 일상에 관심을 갖는 친절한 인문에 대한 상상에서 출발했습니다. ‘길’을 뜻하는 영어 ‘way’와 ‘여보세요’를 뜻하는 중국어 ‘喂[wéi]’를 합쳐 이름을 지었고, ‘길 위의 소통’이란 의미를 불어넣었습니다. 그 이름대로, 는 나 자신의 안부를 묻고 주위의 이웃들, 동물들과 소통하며 생활인문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향해 조금씩 길을 낼 것입니다. Twitter / Instagram.
사진: pencilpenbrush: Twitter / Insta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