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번, MBC. 내게 이 채널은 단순히 하나의 방송 플랫폼이 아니라, 오랜 사랑의 대상이었다.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학창시절을 보낸 나는 ‘드라마 왕국’이라 불리던 MBC의 드라마들을 보며 자랐다. 한류 붐의 초기를 이끌었던 <허준>(1999~2000, 최고시청률 63.5%)이나 <대장금>(2003~2004, 최고시청률 55.5%)등의 정통 사극부터 ‘한국판 프렌즈’를 표방했던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1996~1999, 최고시청률 36%) 까지, 학창 시절의 정서를 지배한 대부분의 콘텐츠는 11번에서 방송된 것들이었다. 지금처럼 다양한 채널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TV외엔 마땅히 콘텐츠를 소비할 플랫폼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내게 TV는 세상사를 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매체였고, 그 중에서도 MBC는 대체 불가능한 채널이었다. 손석희, 엄기영, 백지연, 김주하로 이어졌던 <뉴스데스크>앵커들은 신뢰의 아이콘처럼 보였다(지금은 정말 다양한 방향으로 달라진 분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탐사보도 프로그램이 끼친 영향이 컸다. 2000년대 초중반 < PD수첩 >과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정말 열심히 거대 권력에 짱돌을 던졌다. 군사정권 시절의 과거사부터 철옹성 같던 황우석 신화까지 대상은 다양했다. 우리가 완전무결하다고 믿었던 것들에 그들이 의심을 제기하는 순간, 시청자였던 내 마음은 함께 두근거렸다. 방송사에서 일하고 싶다, 는 마음을 품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채널은 말할 것도 없이 마봉춘, MBC였다.
MBC팬, MBC직원이 되다
대학 졸업반 무렵, MBC 입사 시험을 치뤘다. 경쟁률은 1,000대 1을 가뿐히 넘겼고 나는 가볍게 떨어졌다. 대신 함께 응시했던 한 종합일간지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보수적 논조를 가진 일간지로 분류되는 곳이었다. 나는 거기서 분에 넘치게 좋은 동료들을 만났고 풋내기 대학졸업생이 하기 어려운 경험들을 할 수 있었다. 정말로, 단 한 가지를 빼면 모든 게 좋았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스스로를 ‘OO일보 기자’ 라고 소개하는 일만 빼면. 당시 나는 애써 ‘OO일보 기자’라는 직함과 스스로를 분리하려고 애썼다. 거대 자본이 운영하는 보수 일간지 기자의 정체성이 자아에 스며들지 않았으면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나를 인식할 때 개별적인 ‘나’ 대신, OO일보를 먼저 인식하게 되는 게 싫었다.
MBC야말로 내가 기꺼이 끌어안고 싶은 이름이었다. MBC는 공영방송이면서도 민영방송이다. 지배구조는 공영의 형태, 수익구조는 민영의 형태인 탓이다. 지상파 방송 중 공영방송인 KBS와 상업방송인 SBS 사이의 모호한 이 지점이 당시 내게는 매력적으로 보였다. 당시 MBC는 지나치게 딱딱하지도 말랑하지도 않은 방송사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나 역시 그 이미지를 철썩같이 믿었다. 그리고 MBC에 입사하기만 한다면, 그 방송사가 가진 이미지가 곧 내 이미지가 되리라 생각했다. 정의롭고, 젊고, 창의적인 것들을 생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두 번째 도전에서 합격 통보를 받던 순간 나는 일하고 있던 기자실에서 눈물을 흘렸다. 다니고 있던 신문사 역시 좋은 직장이었지만 나는 좋은 직장을 원한 게 아니었다. 나는 오로지 MBC만을 원했다.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그것은 단순한 구직자의 바람 같은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MBC가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가치들을 사랑했다. 시간이 지나면 내가 MBC를 사랑하는 마음, 그 초심을 잃을 수는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이 아니라 내 사랑의 대상 – MBC – 이 이렇게까지 변하리라곤 차마 예상할 수 없었다. 아마 그 누구도 지금의 모습을 상상할 순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MBC에 벌어진 일들
입사하고 가장 먼저 맞닥트린 풍경은 피케팅이었다. 각종 손글씨를 쓴 작은 피켓을 들고 임원들이 출퇴근하는 시간에 로비에 서 있는 일이었다. 피디들은 자주 모여 비상대책회의를 했다. 프로그램 제작을 담당하는 피디가 심사숙고해 선정한 아이템들이 윗선에서 반려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아이템을 선정하고 제작 결과물에 대해 책임지던 분위기에 익숙했던 피디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파업 중 피케팅 / 전국언론노동조합 문화방송본부
이후에는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되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불방 사태는 2010년 < PD수첩 >에서 벌어졌다. 당시 이명박 정권의 최대 이슈이던 4대강 편을 다룬 < PD수첩 > ‘4대강 수심 6미터의 비밀’ 편이 방송 당일 사장에 의해 방영중지된 것이다. 사장이 일개 프로그램을 직접 시사하고 방영 여부를 판단하는 일은 당시 MBC분위기로는 상상이 어려운 일이었다. 프로그램의 최종 권한과 책임은 해당 프로그램을 방송한 국장이 지는 게 상식이었다. 보도국에선 보도국장이, 드라마국에선 드라마국장이 프로그램을 책임졌다. ‘국장책임제’라고 하는 이 원칙은 80년대 후반 방송 제작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마련된 제도로, 사실상 정부가 임명하는 사장 대신, 실제 제작진을 이끄는 각 국의 국장들에게 권한과 책임을 부여한 것이었다.
머지않아 ‘국장책임제’는 평사원들이 간부들을 평가하는 ‘상향평가제’와 함께 폐지됐다. 회사는 경영권을 강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국장이 바뀌고 부장단들이 바뀌면서 분위기는 나날이 심각해졌다. 피디가 낸 아이템 제안서를 부장이 찢어버리기도 했다. 출근하면 업무와는 별개로 매일같이 이어지는 비상대책회의의 속기록을 작성하고, 아침마다 로비에서 피케팅을 하기 바빴다. 선배들은 모이면 울분을 토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율성과 창의를 최고의 가치로 삼던 분위기는 금새 경직됐다. 결국 MBC는 파업에 돌입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2012년이었다.
170일간의 파업

장례식 퍼포먼스 / 미디어오늘
1월에 시작된 파업은 7월까지 이어졌다. 모든 현업 부서가 일을 내려놓고 파업에 동참했다. 5년 전 MBC를 향한 여론은 호의적이었다.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은 힘내라고 격려를 해주고, 자기 일인 것처럼 분노했다. 노조 사무실은 시민들이 보낸 커피며 빵 같은 간식들로 가득 찼다.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파업 콘서트에는 3,500여명의 시민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내게는 첫 파업이었다. MBC에서 파업이 드문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고[1], 언론자유가 침해 받는 환경에서 파업이란 선택지를 택할 수 있는 것도 MBC가 가진 특권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파업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세상 그 어디에도 파업하고 싶어하는 노동자는 없을 것이다. 일을 좋아하고 회사를 아끼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나 역시 내 일이 좋았고 MBC가 잘 되길 바라는 직원이었다. 그럼에도 파업에 동참할 수 밖에 없었던 건 ‘더 이상 이렇게는 방송할 수 없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파업을 한다고 노는 것도 아니었다. 매일같이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돌리고 서명을 받았다. 월급이 끊긴 채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는 날들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하다고 생각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우리의 무기는 정당성 하나였다.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파업하는 게 아니라 공정방송을 할 수 있게 해달라며 파업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당시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던 KBS와 YTN, 연합뉴스 역시 함께 파업에 참여했다. 생전 처음 가본 동네에서 전단지를 돌리고, 사람들의 서명을 받았다. 동영상을 제작해 배포하고 여의도, 명동, 서울역 등에서 플래쉬몹을 했다. 일할 때보다 더 힘들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4월이 되자 다른 언론사들은 파업을 중단했고 MBC가 혼자 남아 세 달을 더 버텼다. 2012년 7월 17일, 우리는 여의도 공개홀에 모여 파업 중단을 선언하고 현업으로 복귀했다. 170일간의 파업이었다. 유례가 없었던 이 최장기 파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건 당시 대선 유력 후보였던 박근혜측의 약속 때문이었다.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MBC사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떠나가거나 쫓겨나거나 참아내거나”
파업 이후 5년이 지났다. 파업 당시 노조 집행부였던 선배들은 대부분 해고됐다. 2015년에는 회사의 상황을 웹툰으로 그려 인터넷에 올렸던 입사 2년차 예능피디가 해고되기도 했다. 해고 이유는 단순했다. 회사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MBC에 훼손할만한 명예가 남아있긴 할까. 파업 이후 날이 갈수록 상황은 나빠졌다. 해고된 사람들 이외에도 백여 명의 기자와 피디, 아나운서들이 제작과 관련 없는 부서로 발령났다. 베테랑 피디가 스케이트장과 세트장을 관리하는 부서로 보내지기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사에서 근무하기도 한다. 한창 현장을 누벼야 할 기자들은 취재부서가 아닌 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빈 자리는 회사가 대량으로 뽑은 경력직 사원들로 채워졌다. 매년 시행하던 신입사원 공채는 멈춘 지 오래다.
누군가 지금 MBC의 분위기를 수용소로 표현한 적이 있다. 탈출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력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예능과 드라마, 아나운서국에선 많은 사람들이 사표를 내고 프리랜서가 되거나 TVN, 종편 등의 채널로 이동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체념과 절망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가끔 희망을 입에 올릴 때도 소리를 죽인 채다. 파업 이후 지난 5년간 MBC에는 보이지 않는 인사의 법칙이 생겼다. 비판하면, 쫓겨난다. 파업하면, 대체인력을 채용한다. 남은 사람들은 남은 사람들대로 죄책감을 갖게 되고, 점차 숨을 죽이는 데 익숙해졌다. 마봉춘 대신 엠빙신[2], 으로 불리는 데도 익숙해져야 했다. 지난 겨울 촛불집회 취재에서 MBC는 카메라와 마이크에서 언론사 마크를 떼어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엠빙신, 이라는 노골적인 조롱 때문이다.
그동안 MBC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불과 6,7년 사이에 MBC는 비현실적일만큼 다른 모습이 되었다. 그 변화를 지켜보며, 나는 약간의 내상을 입었다. 회사의 상황을 내 일처럼 여기며 슬퍼하고, 분노했다. 이 채널을 오랫동안 사랑해왔기 때문이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의로 이 곳을 떠난 사람들도, 타의로 떠나야 했던 사람들도 모두 나름의 상처를 안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다시 떠올리는 방송강령
이제 MBC는 어떤 미래를 맞게 될까. 공영방송의 지배구조 개선을 골자로 한 언론장악방지법은 지난 2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고 계류돼있다. 어떤 후보가 차기 정권을 잡든, 현재의 지배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MBC의 비극은 되풀이될 것이다. 설사 언론장악방지법이 통과된다 하더라도 MBC의 상황이 나아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 본다. 지난 몇 년간 내부 구성원들이 너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희망을 버릴 수 없는 건, 역시나 사랑 때문이다. 지금의 MBC에서는 불가능한 꿈이란 걸 알면서도 나는 가끔 꿈을 꾼다. 해고된 사람들이 복직하고, 쫓겨난 사람들이 돌아오고, 해체됐던 부서가 다시 조직도에 모습을 드러내는 그런 날을 말이다. 오로지 사랑의 힘에 기대 꾸는 꿈이다. 나는 이 기나긴 터널의 출구가 결국에는 MBC를 더 사랑하는 쪽으로 열릴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 사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지금을 견디기 어렵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럼, 지루했을 긴 글의 마지막은 MBC 방송강령의 한 구절로 마무리할까 한다. 진부해 보이지만 곱씹을수록 마음이 뛰게 만드는 멋진 문장들이다.
“우리는 방송의 주인이 국민임을 명심하고 공영방송으로서 정직한 언론과 건강한 문화창달을 통해 사회적 공익과 국민의 권익 증진에 이바지할 것을 선언한다. 우리는 인권을 존중하고 사회정의와 민주질서를 옹호하며 사회 각층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해 불편부당한 공정방송에 힘쓴다. (중략) 우리는 편성, 보도, 제작의 독립과 자율 그리고 책임을 기반으로 국민이 참여하는 열린 방송을 지향하며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우리는 신속 정확한 보도와 품격 있는 프로그램으로 사회와 문화에 기여하는 전문인임을 깨달아 투철한 윤리의식을 스스로 다지며 이를 행동으로 실천할 것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