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교환학생으로 캐나다에서 머물 때의 일이다. 영화 이론 과목의 첫 수업 시간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교수님과 짧은 대화를 마치고 교실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한 미국인 학생이 내 국적을 물었다. “한국에서 왔어.” 그러자 그는 싸이나 박지성, 이병헌, 심지어 북한의 김정은도 아닌 “한국! 페이커! 제드!”라 외쳤다.
이역만리 캐나다에서 한국 게이머의 닉네임이 들리니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지.아이.조>로 유명해진 이병헌도, <강남스타일>로 MTV 어워즈 에 올라온 싸이도 아니고, ‘페이커’ 이상혁이라니. 페이커를 안다고 말하고, 페이커를 대체 어떻게 아냐고 되물었다. 그는 리그 오브 레전드(이하 LOL)를 아는 사람이 어떻게 페이커를 모를 수 있냐며 어떻게 아냐고 물어본 나를 의아한 눈빛으로 보았다.
혹시 모를 사람을 위해 말하자면 페이커는 현재 SKT TELECOM T1에 소속된 LOL게이머다. ESPN은 그를 The Unkillable Demon King (무적의 대마왕) 이라며 스페셜 피처 기사로 대서특필했다. 지난 2월 5일 밤 11시 55분에 시작된 그의 트위치 방송은 최고 시청자 수 24만 명을 기록했다. 한국은 물론, 중국과 북미 그리고 남미 등 전 세계의 트위치 시청자가 그의 방송을 보았다.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은 의아할 수 있다. 어떻게 한국에서 게임하는 한국 프로게이머가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그 사람을 아냐고 물을 정도의 명성을 가질 수 있었을까. 모르는 사람은 모르고, 아는 사람만 안다지만 한국의 e스포츠 프로신은 관련 업계에선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탄탄하다.
‘넘사벽’ 한국 e스포츠신의 성장과 현황
한국 게이머의 성적은 문자 그대로 ‘넘사벽’이다.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게임인 LOL의 예시를 들어보자. 최고의 권위를 가진 LOL 월드 챔피언십에서 한국팀이 무려 3연속으로 우승을 거두었다. 유럽, 한국, 북미, 동남아, 브라질 등 각국 리그의 순위권팀들이 자웅을 겨루는데, 한국팀이 2014년부터 2016년까지 3연속으로 우승을 했다. 2011년부터 진행된 이 대회에서 한국팀은 우승 4번, 준우승 1번의 기록을 세웠다.
뿐만 아니다. 월드컵으로 치면 컨페더레이션스컵인 MSI(Mid-Season Invitational)에서도 한국팀이 괄목할 성적을 거두었다. 지난 2015년부터 스프링 시즌 우승팀을 초청해 치뤄지는 이 대회에서 한국팀은 지난 3년 간 2번의 우승과 1번의 준우승을 이뤄냈다.
해외 리그의 성적이 좋다고 그 프로스포츠가 건강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 결국 프로는 돈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 프로 게이머들의 연봉은 어떨까?
현재 가장 인기 있는 게임인 LOL에서 가장 잘나가는 프로게이머인 페이커의 2017년 연봉은 한화 30억가량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프로스포츠 최고연봉자였던 김태균의 2배, 현재 프로야구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이대호보다 높다. 지난 2014년 중국 프로게임팀이 수백만 달러의 스카우트 제의를 했으나 페이커는 이를 거절했고, 소속팀인 SKT T1은 그에게 30억의 연봉으로 화답한 셈. 상금과 스트리밍 수익을 제외한 연봉이니, 실수령액은 30억을 뛰어넘을 것으로 예측된다.
억대 연봉은 페이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2015년에 공개한 한국e스포츠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LOL 프로게이머 4명 가운데 1명이 1억이 넘는 연봉을 받았다. 당시 게이머들의 평균 연봉은 6천만 원 후반이었다. 대회의 규모가 커지고, 라이엇게임즈가 연봉을 보조하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 뛰고 있는 게이머들의 평균 연봉은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LCK(LOL 한국 리그) 우승자가 곧 롤드컵(LOL 월드 챔피언십) 우승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 LOL 프로게이머들의 경쟁력은 높다. 그렇다 보니 해외 게임팀에서 고액 연봉을 걸고 한국 선수들을 스카웃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나무위키는 지난 2014년부터 이어진 선수들의 해외 리그 이적을 ‘코리아 엑소더스’라 칭했다.
선수들이 받은 연봉은 거절하기엔 너무나 큰 금액이었다. 지난 2014년에 중국 리그로 이적한 ‘임프’ 구승빈은 중국 돈으로 약 800만 위안의 연봉을 받았다. 한화로 약 13억이다. 한국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중국팀에 스카웃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마린’ 장경환 역시 중국 리그에서 세후 11억 원가량의 연봉을 받았다.
한국 LOL 프로 게임신의 성장엔 제작사인 라이엇 게임즈도 큰 기여를 했다. 1부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에게 최저 연봉 2천만 원을 보장하기 위해 각 팀마다 1억 원을 보조했다. 2017년부터는 2부 리그의 양성을 위해 2부 리그에 소속된 8개의 팀에게 5천만 원의 보조금을 주기 시작했다. e스포츠에서 2부 리그 양성을 위해 투자한 경우는 한국의 LOL이 유일했다.
비록 LOL만 언급했지만, 한국의 프로게임신엔 스타크래프트, 오버워치 등 다양한 게임이 있다. 스타크래프트 1 같은 경우, 게임이 출시된 지 19주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개인 리그가 진행되고 있다. 스트리밍 플랫폼 위주로 진행되고 있는 리그는 팬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꾸준히 열리고 있다.
스타크래프트 2 역시 마찬가지다. 스타크래프트 2 같은 경우, 한국 게이머들의 실력이 월등히 뛰어나 글로벌 대회에서 한국인 쿼터를 도입했다. 총 16장의 월드 챔피언십 티켓 중 8장은 한국 리그에, 8장은 한국을 제외한 해외 리그에 배정했다. 한국인 선수를 보호하기 위한 처사가 아니었다. 2013년 월드 챔피언십엔 16명 가운데 15명이 한국인이었으며, 2014년엔 16명 모두가 한국인이었다. 해외 리그까지 씹어먹는 생태계 포식자인 한국 국적 게이머를 견제하기 위해 리그 쿼터를 도입한 것이다. 비록 팀 단위 리그는 해체되었지만, 개인 리그는 꾸준히 열리며 여전히 한국 게이머의 위상을 떨치고 있다. 한국e스포츠협회에 따르면, 지난 2015년 기준 스타크래프트 2 게이머들의 평균 연봉은 4천만 원 후반대였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왜 한국 게이머들은 종목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어떤 게임에서든 생태계 포식자가 될 수 있던 걸까. 좋은 질문에 좋은 대답이 따른다. 질문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다시 보니 위 질문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다. 첫째, ‘모든’ 종목에 ‘항상’ 최고의 성적을 거두는 건 아니다. 세계 대회에서 우승을 못 하면 뉴스가 되는 스타크래프트 2나 LOL과 달리 도타 2에선 세계 대회에 진출만 해도 뉴스가 된다. 마찬가지로 카운터 스트라이크 : 글로벌 오펜시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즉, 한국 게이머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은 ‘한국에서 인기 많은 게임’에 한정한다. 둘째로 항상 생태계 포식자였던 건 아니다. LOL 같은 경우 2012년까지 한국 리그가 세계 최고의 리그는 아니었다. 2012년 월드 챔피언십은 대만팀인 TPA가 우승했으며, 유럽 리그와 북미 리그의 수준이 한국에 절대 뒤떨어지지 않았다. 해외 대회에서 유럽팀과 북미팀은 심심찮게 한국팀을 꺾었다.
질문을 정정하자. 어떻게 한국 게이머들은 ‘국내에서 인기 많은’ 종목에서 ‘빠른 시일 내에’ 세계 최고가 되었을까?
한국 게이머들이 최고가 된 이유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큰 e스포츠 시장은 아니지만, 게임을 프로스포츠화 하는 데 선구자 격이기 때문이다. 한국 프로게임단의 기원을 찾기 위해선 1990년대로 올라가야 한다. 당시엔 지역의 PC방들이 스타크래프트 대회를 열었는데, 이 대회에서 우승한 게이머들은 그 PC방의 자산이 됐다. PC방 사장님들은 자기 PC방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게이머들에게 PC방을 공짜로 써도 된다며 PC방으로 유인했기 때문이다. ‘동네에서 스타 가장 잘하는 형’을 보기 위해 PC방에 오는 손님들이 많았기 때문에 시행한 일종의 마케팅이었다. 동네에서 가장 잘하는 형들은 특정 PC방으로 모이기 마련이고, PC방에서 합숙하며 스타크래프트를 했다. 그래서 초기 스타크래프트 게임단을 보면 PC방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그렇게 출발한 스타크래프트 1 프로게임신은 KT, SKT, 삼성전자, 오리온 등 다양한 대기업들이 진출하며 더욱 발전했다. 대기업의 진출에 힘입어 스타크래프트 최초의 팀 단위 리그가 2003년에 개막했다. 팀 단위 리그가 유지되기 위해선 지속적인 선수의 수급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각 팀마다 연습생 제도를 도입했다. 배틀넷에서 유명한 게이머들을 각 팀으로 데려와 연습생을 시켜주는 제도였다. 양뿐만 아니라 질도 중요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각 팀들은 선수들에게 혹독한 연습을 시켰다. 출퇴근 없이 숙소와 연습실만을 오가며 다람쥐가 쳇바퀴 돌듯이 연습만을 반복했다. 연습을 강화하기 위해 코치를 고용하고, 코치뿐만 아니라 전술 및 전략 담당을 도입했다.
스타크래프트 1 프로게임신은 ‘닭장’이라 불리는 게임단 연습 문화를 만들었다. 1군은 자유시간없이 연습실과 숙소만을 오가며 연습을 했고, 2군은 1군을 위해 설거지와 빨래를 했다. 어린 나이에 게이머가 된 선수들은, 빠르게 소진되고 빠르게 은퇴했다. 지난 2010년에 발발한 프로게이머 승부조작 사건은 착취가 만연한 환경에 놓인, 장래가 불안정한 프로게이머가 본인의 생존을 위해 취한 합리적 선택이었던 셈이다.
‘닭장’ 문화는 스타크래프트 1 이후의 게임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스타크래프트 1 게임단에서 나온 연습문화가 워크래프트 3, LOL, 스타크래프트 2, 오버워치 등 다양한 프로팀에게 이식됐기 때문이다.
선수들을 모아 프로게임단으로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한국팀이라 타 지역보다 빠르게 선수를 수급하고, 훈련시켰다. 한국 게이머들은 런칭 2년 만에 LOL 세계 대회를 휩쓸었고, 오버워치는 1년 만에 정상에 등극했다. 스타크래프트 2는 베타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최정상을 놓친 적이 없었다.
실제로 많은 해외게임단이 한국 게이머뿐만 아니라 한국의 코치를 영입했다. 북미 LOL 프로팀 클라우드9은 선수 출신 코치 ‘래퍼드’ 복한규를 감독으로 영입했다. CJ ENTUS의 코치 출신인 손대영 역시 현재 중국 LOL 프로팀 I MAY의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CJ ENTUS 선수 출신인 ‘빠른별’ 정민성과 ‘러스트보이’ 함장식 각각 중국과 미국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LG-IM 선수 출신인 ‘파라곤’ 최현일도 유럽 LOL 프로팀 ‘MISFITS’의 코치로 활약 중이다.
PC방 문화 역시 크게 기여했다. 집에서 각자 접속하는 해외와 달리 한국은 친구들과 PC방에 가서 같이 게임한다. 또래집단과 같이 경쟁하니 호승심이 생기고, 호승심이 또다른 경쟁을 낳는다. PC방에서 소리지르며 하는 게임이 양질의 프로게이머 지망생을 낳는 셈이다.
한국 e스포츠신의 성장엔 방송국과 제작사도 크게 기여했다. 게임 제작사가 e스포츠에 투자하는 것이 선택이 아닌 의무인 시대다. 라이엇 게임즈는 LOL 프로 리그 송출권을 판매해 나온 수익을 프로게임팀과 분배하기로 결정했다. 기존 프로 스포츠가 방송 중계 수익을 팀과 나누어 리그의 전체적인 성장을 도모했던 것과 같이, 한국 리그는 물론이요 전체적인 리그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블리자드 역시 올해 2월, 오버워치를 프로스포츠화 하기 위해 지역 연고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온게임넷 역시 다양한 게임의 리그를 주최하여 한국의 e스포츠 토양을 마련했다.
스트리밍 플랫폼: 한국 e스포츠의 미래
PC방이 씨를 뿌리고, 프로게임단이 문화를 만들고, 제작사와 방송국이 판을 깔았다. 한국 e스포츠신엔 이렇게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필요하다. 미래의 한국 e스포츠신은 어떻게 변할까?
생태계의 변화는 새로운 이해관계자의 출현에 달려 있다. 멀리서 날아온 돌이 조용한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듯이 한국 e스포츠 생태계의 변화는 외부 관계자가 만들 것이다. 다시 질문을 바꿔보자. 앞으로 어떠한 사업자가 한국 e스포츠 생태계에 들어올까? 어떤 변화가 있을까?
PC방, 프로게임단, 제작사와 방송국 이외에 ‘스트리밍 플랫폼’이라는 새로운 이해관계자가 출몰했다. ‘밀레니얼’ 이라 불리는 젊은 세대가 e스포츠로 눈을 돌리자 아프리카 TV로 대표되는 스트리밍 플랫폼이 e스포츠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볼프스부르크, 터키의 페네르바체 등 기존 프로 구단이 프로게이머를 영입해 팀을 창단한 것과 같은 이유다.
트위치와 아프리카 TV 그리고 유튜브 등 생방송 스트리밍을 하는 사업자들에게 e스포츠는 매력적인 콘텐츠다. 기존 프로스포츠에 비해 중계권료가 저렴하지만 관객의 연령대는 상당히 젊다. 싼 가격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밀레니얼 시청자를 잡을 수 있는 도구다. 통계 전문 포털 스태티스타(Statista)는 전세계 e스포츠 시장의 매출이 2020년까지 15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페이스북은 e스포츠 대회 주관기업인 ESL과의 계약을 통해 ESL이 주최하는 e스포츠 대회를 페이스북을 통해 생방송으로 내보내기로 했다. 유튜브 역시 최근 카운터 스트라이크 : 글로벌 오펜시브의 프로리그 독점 송출권을 따내는 등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트위치는 직접 대회를 열거나 프로게임팀을 후원하며 등의 전략을 펼치고 있다. 한국의 아프리카 TV 역시 스타크래프트 1, 워크래프트 3, 철권 7 등 다양한 게임의 e스포츠화에 투자하고 있다. e스포츠가 곧 스트리밍 플랫폼의 킬러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스트리밍 플랫폼의 e스포츠 투자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 남미의 시청자가 페이커의 방송을 보고, 한국 시청자가 중국 리그를 본다. 각국의 리그가 개별적으로 진행되던 과거와 달리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전세계가 하나로 연결된 셈이다. 과거 e스포츠는 그들만의 리그였다. 개별 국가의 시청자만, 그 국가에서도 소수만 즐기는 그들만의 리그였다. 하지만 달라졌다. 한국 e스포츠는 프로 게이머, 프로 게임단, 나아가 e스포츠 문화를 수출했다. e스포츠는 모바일 시대, 스트리밍 시대에 밀레니얼의 관심을 훔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