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아이돌 멤버 7명이 한꺼번에 나오는 드라마를 상상해 보라. 일단 비주얼은 끝내줄 것 같다. 그렇다면 연기력은 어떨까. 시청률은 잘 나올까. 한국 방송가에서는 최근 색다른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아이돌 출신 배우를 뽑기 위한 프로그램부터 아이돌이 직접 만드는 웹드라마까지 ‘아이돌’과 ‘연기’를 접목한 프로그램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KBS가 제작하는 ‘아이돌 드라마 공작단’은 걸그룹 멤버 7명이 직접 대본을 쓰고 출연하는 드라마다. 레드벨벳 슬기, I.O.I. 출신 전소미, 마마무 문별, 러블리즈 류수정, 오마이걸 유아, 소나무 디애나와 김소희까지 총 7명의 걸그룹 멤버가 출연을 확정했다. 5월 29일 네이버 TV 캐스트와 유튜브 채널을 통해 선공개되며, 추후 KBS Joy와 KBS 월드 채널에서 방송된다.
△ ‘아이돌 드라마 공작단’에 출연하는 레드벨벳 슬기의 티저 영상.
‘아이돌 드라마 공작단’은 본 방송에 앞서 4월 10일부터 네이버 TV 채널을 통해 일주일 간 매일 멤버별 티저 영상을 공개하고 있다. 첫 타자는 레드벨벳 슬기다. I.O.I. 출신 전소미와 같은 Mnet ‘프로듀스 101’ 출신으로 솔로 데뷔를 앞둔 가수 김청하가 극에 깜짝 등장한다는 소식도 들려오며 연예 커뮤니티가 들썩이고 있다. 쟁쟁한 걸그룹 멤버들이 모인 만큼 앞으로 공개될 카메오 군단도 기대를 모은다.
‘아이돌 드라마 공작단’은 출연하는 멤버들이 드라마 작가와 대본을 공동 집필한다. 화려함 뒤에 숨은 걸그룹의 애환과 고민을 담아낸 ‘리얼 아이돌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것이 제작진의 포부. 연습생 시절부터 걸그룹 출신이면 공감할 수 있는 힘든 점, 데뷔까지의 우여곡절 등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낼 예정이다.
한편 4월 11일 K STAR에서 방송을 시작한 ‘내가 배우다’에서는 8명의 아이돌이 드라마 출연을 놓고 치열한 대결을 펼친다. 방송인 탁재훈과 조우종이 진행을 맡고, 매드타운 조타, 크나큰 박승준, 빅톤 정수빈, 마이틴 송유빈, AOA 찬미, 나인뮤지스 금조, 에이프릴 나은, 모모랜드 낸시 등이 출연한다. 아이돌들의 연기 지도는 연기 트레이너 안혁모 원장이 맡았다.
가수와 연기자의 경계가 옅어지는 상황에서 드라마와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킬 차세대 ‘연기돌(연기+아이돌)’을 찾는 것이 프로그램의 목적. 8명의 아이돌은 싸이더스iHQ에서 제작될 드라마에 출연하기 위해 자신의 끼와 재능을 펼치며 미션을 수행해나간다.
4월 10일 경기도 고양시 빛마루 방송지원센터에서 열린 프로그램 제작발표회에서 진행자들은 “8명의 아이돌 중 가능성 있는 아이돌이 2~3명 정도 있다”라고 말했다. 현장에서는 찬미와 박승준이 즉석에서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모두 ‘연기 초보’이다 보니 걱정도 기대도 남다른 모습이었다. AOA 찬미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 연기 호흡을 맞추는 게 어려웠다. 짧은 순간에 외워야 할 대사가 많다”라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매드타운 조타는 “로버트 드 니로가 롤 모델이다. 한 번도 연기를 배워본 적이 없어서 프로그램을 통해 연기를 경험하고 발전해 나가고 싶다”라고 도전 이유를 밝혔다. 나인뮤지스 금조는 “가수 활동은 멤버들과 함께 하지만 연기는 혼자 해야 하기도 하고 경쟁을 해야 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 부담이 된다”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아이돌이 드라마에 출연한다고 하면 ‘발연기’ 논란이 빠지지 않는다. (여기서 발연기는 연기를 발로 한다는 뜻으로, 연기의 기본기가 갖춰지지 않은 아이돌이 유명세 때문에 실력 있는 배우들보다 먼저 주연급 자리를 꿰차는 상황을 비꼬는 말로 쓰인다.) 부단한 노력으로 이런 편견을 깨는 아이돌도 있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 주연으로 연기 신고식을 치른 에이핑크 정은지나 ‘응답하라 1988’ 주연을 맡은 걸스데이 혜리 등은 캐스팅 당시 드라마의 퀄리티를 떨어뜨릴 거라는 우려를 받았으나 진정성 있는 연기로 시청자에게 인정받았다. 아직까지 ‘연기파 배우’라고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극에 이질감 없이 녹아들 정도로는 성장했다.
남자 아이돌 중에서도 “얘가 아이돌이었어?” 싶은 배우들이 있다. 최근 종영한 KBS 드라마 ‘김과장’에 출연한 2PM 준호나 SBS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 출연한 엑소(EXO) 디오(도경수),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엠블랙 출신 이준 등은 모두 업계가 주목하는 배우로 성장했다. JTBC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에 출연 중인 박형식과 tvN 드라마 ‘미생’, 영화 ‘변호인’ 등에 출연한 임시완은 모두 아이돌 그룹 제국의 아이들(ZE:A) 출신으로 가수 활동보다 배우 활동으로 더욱 인정받았다.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끈 tvN 드라마 ‘도깨비’에 출연한 비투비(BTOB) 육성재도 다수의 작품에서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 tvN 드라마 ‘미생’에서 임시완은 비정규직 사원 장그래 역을 맡아 호평받았다.
실제로 연기자가 되기 위한 발판으로 아이돌의 길을 걷는 이들도 늘었다. 대중도 이들의 속내를 안다. 여러 아이돌 출신 배우들이 만들어낸 긍정적 이미지 덕에 연기만 잘 한다면야 출신이 뭐든 상관없다는 분위기다. 새롭게 배우를 꿈꾸는 아이돌들에게는 기회가 커진 셈이다. 걸스데이 멤버 혜리는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제작진과의 미팅에서 “노래보다 원래 연기를 하고 싶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고, 샤이니 멤버 민호도 영화 ‘두 남자’ 개봉을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원래 꿈은 가수가 아닌 연기자”라고 말했다. 애프터스쿨 탈퇴 후 배우의 길을 걷는 이주연의 원래 꿈도 가수가 아닌 배우였던 것은 이들과 마찬가지. 아이오아이(I.O.I) 출신 김소혜는 연기자 연습생임에도 아이돌 걸그룹을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 Mnet ‘프로듀스 101’에 출연해 최종 데뷔 멤버 11인에 들었다. 이후에도 가수가 아닌 연기자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아이돌 드라마 공작단’과 ‘내가 배우다’에서 제2의 정은지와 임시완을 만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야 대환영이다. 우리는 언제나 신선한 마스크에 목말라 있다. 연기 잘 하는 연기자를 어떤 제작자가 마다하겠는가. 그가 아이돌 출신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실력만 갖추고 링 위에 오른다면 누구도 돌을 던질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