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나라에서 섬은 최고의 여행지다. 일반적으로 섬에 가는 사람들은 바다, 따스한 햇볕, 푸짐한 해산물을 찾는다. 반면 환상적인 스포츠 경기를 찾아 섬까지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 제주도는 특이한 곳이다. 한국에서 가장 익사이팅한 축구를 하는 팀, 이번 시즌 진지하게 우승을 노리는 팀이 제주도에 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건 우승 후보인데도 여행자들은 고사하고 섬 주민들조차 이 팀의 경기를 거의 찾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제주도 유일한 프로 스포츠 팀
섬을 연고지로 삼은 구단은 지중해를 끼고 있는 유럽 국가에 많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팔레르모, 사르데냐의 칼리아리, 스페인 마요르카 섬에 있는 동명의 구단, 프랑스 코르시카의 바스티아 등등. 이들의 운명은 비슷하다. 다른 팀과 육로로 교류할 수 없기 때문에 전국 리그에 합류하는 시기가 늦었다. 지금은 비행기로 다른 팀과 경기를 가질 수 있지만 여전히 섬은 고립된 연고지다. 팬으로 만들 수 있는 인구가 적고, 원정 경기마다 긴 여행을 해야 한다. 이런 한계 때문에 섬을 기반으로 한 명문 클럽은 거의 없다. 1부와 2부를 오가다가, 가끔 1부 리그(top division)에서 4~5위 정도를 차지해 국제대회에 나가지만, 다음 시즌 다시 강등의 위협에 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주특별자치도를 연고로 한 제주유나이티드도 유럽의 섬 구단들과 비슷한 점이 있다.
제주는 한국에서 가장 독특한 지역이다. 한국에서 가장 큰 섬이자 인구가 약 65만 명인 독립된 행정구역이다. 화산 폭발로 형성된 섬이라는 점도 한국에서 굉장히 특이한 점이고, 섬 어디서나 중앙의 한라산을 볼 수 있다. 오래된 건물과 돌담들은 현무암을 써서 검은색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말투는 한국말이 아닌 것처럼 들릴 정도로 차이가 크다. 산, 바다, 독특한 문화와 식생활, 여기에 최근 집중적으로 들어선 멋진 식당과 카페 들이 섬 전체에 빼곡하다.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 중 하나다.
제주는 교통 문제 때문에 2000년대 초까지 어떤 프로 스포츠 팀도 갖지 못했지만, 도내 학교들끼리 벌이는 축구 대회에 수만 명이 모일 정도로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잠재돼 있는 곳이었다. 2002 한일 월드컵 때 축구전용구장이 생겼고, 2006년 마침내 이 구장을 홈으로 쓰는 축구팀이 들어왔다. 서울 근처 도시 부천시를 연고로 하던 부천SK가 제주유나이티드라는 이름으로 바꾸며 제주도를 연고로 정한 것이다.
연고이전 첫 해, 제주는 최하위였다. 2009년에는 포항스틸러스에 1-8로 지며 K리그 한 경기 최다 실점 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2010년부터 제주의 성적이 완전히 변했다.
제주는 2010년 감독 경험이 적은 박경훈을 선임했다. 박경훈은 제주를 한국에서 가장 기술적이고 빠른 팀으로 완전히 바꿔 놓았다. 잉글랜드에 아르센 벵거가 등장해 아스날을 가장 보기 좋은 팀으로 만들었던 것과 비슷한 효과가 났다. 제주는 그해 아슬아슬하게 준우승했다. 제주는 다른 팀에서 실패한 선수를 부활시켰고, 아직 어린 선수를 성장시켰다. 2010년에 21세였던 구자철과 홍정호는 나중에 분데스리가에 진출하며 한국 최고 스타로 성장했다.
일단 팀 컬러가 잡히고 성적이 급격히 향상되자, 제주는 꾸준히 중상위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중해 섬 구단들과 비슷한 한계가 제주에도 찾아왔다. 다른 팀들은 1년에 두 번만 가장 먼 제주까지 원정 경기를 가면 된다. 반면 제주는 2주에 한 번씩 복잡한 교통편으로 원정 경기를 가야 했다. 예를 들어 한국 프로 구단 중 가장 북동쪽에 위치한 강원FC와 경기를 가지려면 제주 공항에서 원주 공항으로 가는 비행편을 이용하면 된다. 문제는 이 비행편이 하루에 한두 번만 있다는 점이다. 비행 시간을 맞추려면 경기 전 하루, 경기 후 하루를 이동에 꼬박 투자하는 경우도 많다. 전용기를 마련할 생각도 해봤지만 결국 실현하지 못했다. 제주가 한국에서 가장 남쪽에 있고 가장 더운 지역이라는 것도 문제였다.
한국에서 가장 재능 넘치는 팀
2010년 월드컵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던 김재성은 제주가 연고지를 처음 옮긴 2006년 당시 멤버였고, 작년에도 제주에서 반 시즌 동안 뛰었다. 올해는 호주 팀인 애들레이드 유나이티드 소속으로 원정 경기를 하러 제주도에 돌아왔다. 김재성은 “2006년엔 선수들이 유배된 기분을 느꼈다. 집단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을 정도였다. 지금은 애들레이드에 팀 훈련장을 빌려줄 정도로 여유 있는 팀이 됐다. 모든 면에서 엄청나게 발전했다”고 말했다.
제주는 작년부터 정상을 넘보는 팀으로 발전했다. 2014년 박경훈의 후임자가 된 조성환은 제주 스타일의 축구를 유지하면서도 한층 전투적으로 만들었다. 서귀포에 모여 사느라 답답해하는 선수들을 서너 명씩 데리고 나가 밥을 사 주며 팀을 결집시켰다. 더 강해진 제주는 작년에 K리그 클래식 3위에 올랐다. AFC(Asian Football Confederation) 챔피언스리그(ACL)에 나갈 수 있는 순위다.
우승 가능성을 본 SK는 제주에 꽤 투자를 했다. 지금 제주의 스쿼드는 K리그에서 전북현대 다음으로 강하다. 개성 넘치는 선수들이 모여 있어 더 매력적이다. K리그에서 가장 측면 돌파가 뛰어난 안현범, 가장 중거리슛이 강한 권순형, 가장 빠른 선수 황일수가 그렇다. 루카 모드리치를 연상시키는 다재다능한 이창민, 수비수 중 가장 노련하고 50미터 거리까지 정확한 패스를 할 수 있는 조용형이 제주를 더 지능적이고 기술적인 팀으로 만든다. 제주는 브라질에서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동아시아에서 최고 활약을 할 수 있는 선수를 잘 찾아내는 팀이기도 하다. 브라질 선수들의 창조성도 제주 축구를 더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다.
올해 제주는 K리그 클래식, ACL, 한국 FA컵에 동시에 도전하고 있다. 조성환은 “삼관왕(트레블)이 목표”라고 공언했다. 현재 제주는 K리그 클래식에서 1위이며 ACL과 FA컵에서 모두 생존했다. 리그에서 가장 골을 많이 넣으며 여전히 재미있는 축구를 하는 팀이다.
‘다들 약해졌다면, 지금이 기회다’
마요르카, 팔레르모 같은 팀과 달리 제주가 정상을 노릴 수 있는 건 K리그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다. 지금 K리그는 정상권을 이루던 팀들이 일제히 약해졌다. 제주는 지난해 3위에 오르는 과정을 통해 상위권 팀들의 전력이 예전보다 약하다는 걸 확인했고, 우승을 목표로 SK의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최근 K리그 우승을 나눠가진 팀들은 전북, FC서울, 포항스틸러스였다. 여기에 가장 인기 많은 팀인 수원삼성, ACL에서 유독 강력한 울산현대가 우승에 도전할 자격이 있는 팀들이었다.
이 팀들 중 전북을 제외한 모든 팀의 전력이 전보다 약해졌다. K리그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던 시기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였다. 그 뒤로 야구 인기가 급격하게 높아지고 가장 뛰어난 축구 선수들이 유럽으로 다수 진출하며 국내 리그에 대한 관심은 점점 시들해졌다. 2013년 K리그는 소속 구단들의 총연봉을 공개하기로 했다. 각 구단의 재정을 투명하게 대중에 공개하고, 방만 경영을 막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현실적인 효과는 약간 더 한심했다. 각 프로팀은 ‘왜 우리가 저 팀보다 돈을 많이 쓰는데도 순위가 낮냐’는 모기업의 압박에 시달리며 경쟁적으로 연봉 규모를 줄였다. 특히 수원의 선수단이 가장 빨리 약해졌다. 2016년 수원은 12팀 중 7위까지 추락했다. 올해도 현재 5위다.
K리그는 동아시아 리그 중 가장 인기가 없지만, 실력은 가장 뛰어난 리그 중 하나였다. ACL을 보면 안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5년 연속으로 한국 팀이 결승에 올랐고 포항, 성남일화(지금은 사라지고 성남시가 관장하는 성남FC가 연고지를 이어받았다), 울산이 각각 우승했다. 작년에는 전북이 우승했다. 축구 리그가 정비된 일본은 물론 엄청난 돈으로 헐크, 라미레즈 같은 선수들을 영입한 중국팀들도 K리그 클럽들보다 약했다.
하지만 올해,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도 옛말이 됐다. 전북이 4년 전 심판을 매수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올해 ACL 참가 자격을 잃어버렸다. 전북을 빼고 참가한 4팀 중 울산, 서울 수원이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토너먼트 단계로 올라간 한국 팀은 제주뿐이다. 중국 클럽 3팀, 일본 클럽 3팀이 토너먼트 단계로 진출한 것에 비하면 한국 팀들의 성적은 심각하게 부진하다. 그나마 제주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다들 돈을 덜 쓸 때, 전북과 제주는 다른 생각을 했다. 모두들 선수단에 들어가는 돈을 줄인다면, 돈을 약간만 늘리는 팀은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 전북은 매년 겨울마다 국가대표 선수를 계속 영입해 다른 팀들과 차원이 다른 선수단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제주도 최근 2년 동안 열심히 선수를 영입했고, 몇 년 뒤에 한국 최고가 될 수 있는 어리고 재능 넘치는 선수들을 독점하는 데 이르렀다.
제주는 한국 축구의 특이한 상황을 잘 이용해 강해졌다. 경기 방식도 흥미진진하다. 전북이 무슨 수를 쓰든 승리만을 추구하는(알렉스 퍼거슨 시절 맨체스터유나이티드와 자주 비교된다) 팀이라면, 제주는 더 스타일리시한 팀이다.
그러나 제주도민 중 제주가 언제 누구와 경기하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제주는 관중이 많을 때 5천 명, 가장 적을 때는 2천 명을 겨우 넘긴다. K리그 관중이 많이 줄어들었다지만 우승을 노리는 팀의 인기라기엔 너무 부족하다. 장석수 제주 CEO는 내게 “서귀포에서 축구하는 건 한계가 분명하다”고 말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1999년 경기장 건설을 시작할 때 제주도 인구가 모여 사는 제주시가 아니라 서귀포를 택했던 것이 치명적이었다. 제주도는 북쪽의 제주시와 남쪽의 서귀포시로 구분된다. 제주시 인구는 약 47만, 서귀포시 인구는 약 18만이다. 그 중에서도 서귀포 시내에 사는 인구는 10만 명 정도다. 프로 스포츠 팀을 운영하기에는 너무 작은 연고지다. 특히나 제주처럼 중간에 연고지를 옮겼기 때문에 축구팬 사이에서 ‘배신자’라는 오명을 달고 시작한 팀은 관중을 모으기 더 어려웠다.
유일한 문제는 경기장이 텅 비었다는 것
제주는 K리그에서 가장 다양한 아이디어를 발휘해 관중을 모으기 위해 노력했다. 박경훈의 머리가 백발이라는 점에 착안해 관중 2만 명이 모이면 머리를 유니폼 색인 주황색으로 염색하겠다는 공약을 걸기도 했다. 박경훈은 결국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감독이 바뀐 뒤 2015년 제주를 찾아와 조성환과 함께 주황색 머리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제주는 가장 잘생긴 선수들을 지역 라디오, 각종 지역 행사장에 보내 팬을 늘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나마 효과를 본 것이 지금 정도 수준이다. 과거에는 인기 없는 경기에 1천 명도 모으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최소 2천 명 정도는 유지하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제주에 ‘외국인들에게 제주 구단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제주 홍보팀은 “제주 홈 구장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기장’으로 불린다. 바다와 한라산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이 곳에서 바르셀로나를 연상시키는 제주 축구를 보는 건 제주도에서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즐거움”이라고 했다. 그리곤 카카오톡으로 외국인 관중이 얼마나 되냐고 물었더니 대답 대신 “제주도민도 별로 없잖아요”라고 말했다. 관중이 적다는 것이 이 팀의 유일한 단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