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신이 보는 것은 한국의 인기 스타 이영애가 출연한 카메라 광고이다. 다음 장면은 한국의 인기 스타 이영애가 해외에서 촬영한 고급 시계 광고이다.’
아마 1월 26일부터 한국에서 방송을 시작한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의 몇몇 장면을 잘라놓고 이런 설명을 붙인다면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장면은 한국의 5만 원짜리 지폐에 등장하는 여인―조선시대 사임당 신씨―의 삶을 재해석한 ‘퓨전 사극’의 장면들이다. 어떻게 이런 장면이 사임당의 삶을 그리는 드라마에 나올 수 있었을까? 그 답은 어디에 가져다 붙여도 그럴싸해 보이는 ‘퓨전’이라는 마법의 키워드와 한국 사극이 사랑하는 ‘타임 슬립’이라는 장치에 있다.
‘사임당 빛의 일기’는 최고의 한류 스타 이영애가 드라마 ‘대장금’ 이후 13년 만의 복귀작으로 선택한 드라마였기에 방송 전부터 화제였다. 일반적인 사극의 룰을 답습하지 않고 타임 슬립을 차용한 퓨전 사극의 길을 택한 것 또한 이야깃거리였다. 실제로 1화에서는 조선시대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고 과거의 이탈리아와 현재의 서울이 배경지로 나온다. 아마 이영애가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포스터를 보고 이 드라마를 보겠다고 마음먹은 시청자였다면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게 어딜 봐서 사극이야?
진부한 스토리, 안일한 짜임새, 빈약한 당위성, 억지 설정 등을 차치하더라도 결정적으로 이런 비판이 나온다. “왜 그냥 사극이 아닌 타임 슬립 퓨전 사극으로 만들었느냐?” 시청자의 비난에 직면한 제작사는 다급하게 방송 분량을 전면 재편집했다. 일부 회차에서는 아예 현대 장면을 빼고 사극으로만 채웠다. 그 덕에 줄곧 하락하던 시청률은 현재 10% 대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전 제작 드라마인지라 언제까지 현대 장면을 빼고 갈 수는 없어 난처한 상황이다.
한국에서 ‘한복을 입은 배우 이영애’의 이미지는 좋은 의미로 압도적이다. 이영애는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홍보 영상에서도 이 압도적인 이미지로 등장해 평창을 신비로운 동방의 어느 멋진 나라로 바꿔놓는다. 그렇다면 다시 비슷한 의문점이 생긴다. ‘저런 이영애’를 데리고 전통 사극을 만들었으면 평균 이상의 인기를 구가했을 텐데 굳이 현재 장면을 왜 넣었지? 결국 ‘돈’이다. 전통 사극은 ‘PPL(Product Placement)’ 붙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드라마와 PPL은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시청자는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천송이(전지현 분)가 입고 나온 버버리 코트를 사고 싶어 하고, 천송이가 바른 립스틱이 어느 회사 어느 컬러인지 확인하길 원한다. 천송이가 극 중 열심히 먹는 치맥(치킨+맥주)을 덩달아 시켜먹는다. 그러나 ‘장희빈’이나 ‘여인천하’에서 여인들이 입고 나온 당의나 머리를 장식하는 데 쓴 가채, 비녀 등이 어디 제품인지 알고 싶어 눈에 불을 켜고 검색한다거나 극 중 나오는 궁중음식을 맛보기 위해 한식당에 주문 전화를 건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일이 있는가?
결국 ‘사임당 빛의 일기’도 PPL을 넣기 위해서 퓨전 사극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 드라마에는 동명의 한국 화장품 브랜드 ‘사임당’의 PPL도 붙었다. ‘사임당’의 모델은 이영애다. 아마 조선시대를 다루는 전통 사극이었다면 영양크림을 떠서 얼굴에 펴 바르거나 파운데이션을 두드리는 장면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근래 흥행에 성공한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 ‘인현왕후의 남자’도 타임 슬립을 결합한 퓨전 사극으로 현대 장면을 넣으면서 PPL에서 재미를 본 작품들이다.
드라마에 자사 제품을 PPL 하기 위한 기업들의 노력은 눈물겹다. 기업에서 죽어라 마케팅해도 팔리지 않던 가방이 드라마에서 여배우가 한 번 들고 나오자 그 즉시 ‘완판(완전 판매)’된다. PPL 단가는 평균 수천 만원에서 수억 원에 이르지만, 그만큼 마케팅비를 쓰기보다 잘 나가는 드라마에 PPL 한 번 넣는 게 훨씬 효과가 좋다는 업계 관계자들의 이야기는 과장이 아니다.
심지어―지금은 한국의 사드 배치 결정 이후 중국 당국의 ‘한한령’ 때문에 주춤하기는 했지만―얼마 전까지는 중국 기업도 한국 드라마에 PPL을 넣을 정도였다. 한국 드라마의 인기와 그로 인한 PPL 효과가 크다고 봤기 때문이다. 키움증권의 ‘드라마 산업,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다’ 리포트에 따르면 중국 기업들은 2014년부터 한국 드라마 PPL 및 협찬에 참여했다. 드라마를 보게 될 중국인에게 자사 제품을 마케팅 하는 수단으로 한국 드라마를 활용한 것이다. 자국 드라마가 아닌 한국 드라마에 제품 노출을 해서 자사 브랜드 선호도를 높인다는 중국 기업들의 새로운 마케팅 전략은 여러 모로 재미있게 들린다.
한국에서 PPL은 치솟는 제작비를 충당하는 수단이 된 지 오래이다 보니, 때로 주객이 전도되기도 한다. 한국 드라마를 보다 보면 이야기를 진행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장면이 갑자기 나오는 것을 자주 봤을 것이다. 가족과 이야기하다 말고 마사지기를 가지고 얼굴을 마사지하며 기능을 설명하거나, 뜬금없이 휴대전화를 꺼내 세면대에서 물로 씻는다거나, 법원에 가려는 변호사를 불러 세워 놓고 ‘이런 얼굴로 가니까 맨날 지지’라며 립스틱을 발라주는 장면 같은 것 말이다. 지나친 PPL은 작품의 퀄리티에도 영향을 끼친다.
미디어오늘의 보도에 따르면 tvN 금토드라마 ‘쓸쓸하고 찬란하신-도깨비’의 1회~16회 모든 방송분을 확인한 결과 270개의 PPL 장면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시청자가 드라마 한 편을 볼 때마다 약 17건의 PPL 장면을 본 셈이다. 극 중 지은탁(김고은 분)은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PPL 업체인 치킨 브랜드 ‘BBQ’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이 치킨집 냉장고에는 탄산음료나 맥주 대신 ‘코카콜라’의 PPL 음료가 가득 들어 있었다. 지은탁이 도깨비를 소환할 때 쓴 향초도 PPL 제품이었다. 이 브랜드는 아예 ‘도깨비 캔들 패키지’를 판매하고 있다. 이쯤 되면 지은탁의 졸업 선물로 김신(공유 분)이 선물한 가방과 향수가 PPL 제품임을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 작품은 작가의 명성과 배우의 인지도를 활용해 제작 초기부터 PPL을 끌어왔는데, 수익이 70억 원을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전통 사극은 PPL의 덫에서 안전할까. 그렇지 않다. 현대극에 비해 PPL을 할 수 있는 폭은 좁지만, 돈이 흐르는 곳에 아이디어도 있다던가. 사극은 관광지나 문화유산이 많은 지방자치단체가 제작비를 지원해주고 광고를 싣는다. ‘○○ 드라마 촬영지’ 타이틀은 지자체에게 좋은 홍보 수단이 되어준다. 경주에서 촬영한 ‘선덕여왕’, 합천에서 촬영한 ‘무신’ 등이 그 예다. 드라마 내에서 지역 특산물 홍보도 한다. ‘짝패’에서는 고창 복분자와 풍천 장어를 극 중 인물의 대사로 홍보했고, ‘동이’에서는 문경 오미자를 홍보했다.
이렇게 PPL이 비집고 들어가기 쉽지 않은 전통 사극에 기업과 제작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참신한 방법으로 제품 홍보를 넣는 걸 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사극 PPL 레전드’ 장면으로 돌아다니는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PPL 장면. 조선의 저잣거리에 한글로 크게 ‘목우촌―농협의 육가공 제품 브랜드―’이라는 고깃집 간판이 내걸렸다. 제작사 측은 이 장면이 PPL이 맞고 숙종 시대임을 고려해 간판을 한자가 아닌 한글로 표기했다고 밝혔다. MBC 드라마 ‘아랑사또전’에서는 무당 방울(황보라 분)이 보쌈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 장면이 자주 나왔는데 ‘놀부보쌈’의 PPL이었다. ‘놀부보쌈’은 매장에서 ‘아랑사또 세트메뉴’를 개발해 판매했다.
하지만 직접 노출이 불가능하고 매출 상승으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사극 PPL은 상대적으로 꺼려진다. 과거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는 직접 노출이 안 된다는 이유로 PPL 기회를 놓쳤다. 디스패치의 보도에 따르면 극 중 세종(한석규 분)이 소고기를 좋아하고 가리온(윤제문 분)이 백정이라는 점을 이용해 한우 PPL을 넣을 생각이었으나, 한우농가에서 ‘한우’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쓰지 못하면 협찬이 어렵다고 해 결국 무산됐다.
이 때문에 전통 사극이 제작비를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은 수출뿐이다. 퓨전 사극이 구세주적 대안으로 떠오른 것도 이 때문이다. 2012년 방송한 SBS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는 현대로 타임 슬립한 왕세자와 심복 3인방의 웃지 못할 현대 사회 적응기를 그린 작품. 극 중 왕세자 이각(박유천 분)은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는 여고생들을 보다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편의점 직원에게 “저 국수를 내오너라”라고 호통을 쳤다. 이 컵라면은 오뚜기 ‘기스면’ PPL이었는데 당시 이 업체 광고 모델이 박유천이었다. 배우들이 극 중에서 입고 나온 티셔츠는 JYJ가 모델로 활동한 의류 브랜드 NII의 제품이었다.
같은 해 방송한 tvN 드라마 ‘인현왕후의 남자’는 조선 시대 선비 김붕도(지현우 분)가 인현왕후의 복위를 위해 시간 여행을 하며 겪는 이야기를 다뤘다. 김붕도는 300년을 거슬러 내려온 후 자신이 인현왕후라고 주장하는 무명배우 최희진(유인나 분)을 만나고, 신비의 부적 덕에 조선과 현대를 오가며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랑을 나눈다. 만약 김붕도가 시간 여행을 해서 현대로 오지 않았다면 ‘아우디’가 자사의 자동차를 이 작품에 나오게 할 수 있었을까. (참고로 ‘옥탑방 왕세자’에는 ‘포드’의 익스플로러, 포커스, 머스탱 등이 PPL로 나왔다.)
앞으로도 드라마 제작 환경이 특출나게 개선되지 않는 한 ‘사임당 빛의 일기’ 같은 퓨전 사극은 계속해서 나올 것이다. 전통 사극을 보는 것도 점차 어려워질 것이다. 세상은 돈의 논리로 돌아간다. 작가와 배우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상황에서 드라마 업계도 이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시청자에게로 돌아간다.